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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의 아름다운 얼굴 ⑧ “떡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거요? 양심이죠.”

입력 : 2015-02-10 10:26:00
수정 : 0000-00-00 00:00:00

파주의 아름다운 얼굴 8





유 홍 창 



 



새말 안 ‘서울방앗간’



서울방앗간은 새말 재개발지구 안에 있다. 금촌역 뒤쪽에서 새말 안으로 들어가는 골목은 차도 다니지 못하는 길이다. 중간중간 빈 집들 사이에서 개들이 짖는다. ‘덕암설비공사’라는 키낮은 가게가 보일러 공사, 파이프 공사, 줄눈 공사를 크게 써붙인 유리문을 닫은 채, 예전의 화려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골목길 안 ‘덕암문구’ 라는 간판 글씨가 옛스러웠다. 한쪽 골목에는 누군가 그림을 그려 허전함에 그나마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증기가 뿜어져 나오는 3층 건물 1층에 ‘서울방앗간’이 있었다. 새벽 찬 공기에 떡 찌는 증기가 멋들어지게 하늘로 흩어지고 있었다. 



 



방앗간 2대째, 60년 역사  



이 방앗간은 8년 전 ‘MBC 고향은 지금’에도 나온 입소문 난 곳이다. 한국전쟁 때 원산에서 혼자 내려온 아버지가 시작한 방앗간을 아들이 이은 60년 역사를 자랑한다. 아버지가 40년간 하다 돌아가시고, 유홍창 씨(59세)가 아버지를 도와서 일하기 시작해서 40년이 넘는 세월을 떡을 쪄온 셈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유홍창 씨 부부가 찰범벅 떡을 만들고 있었다. 찰범벅은 찹쌀에 호박말랭이, 밤, 대추, 해바라기씨, 여러 가지 콩 등을 넣어 만드는 영양식 떡이다. 유씨는 찜통 앞에서 고물들을 찹쌀과 잘 섞는 작업을 하고 있었고, 부인은 다 쪄진 찰범벅을 같은 크기로 자르고 있었다. 유씨가 무슨 떡을 좋아하냐고 자꾸 묻는다. 웃고만 있는 나에게 부인이 말한다. 



“저 양반은 남 주는 거 좋아해요. 저 양반 신조가 뭐냐면, 우리집 오는 사람에게 떡을 쥐어줘서 보내야한다는 거예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부인도 남편과 다르지 않은 듯하다. 마음이 그러니, 남는 것도 없을 듯 싶다.



“양도 제 양을 맞춰야 하고, 수입깨라도 우리가 직접 짜서 쓰고, 좋은 쌀 쓰고, 재료도 좋은 거 쓰고... 돈은 덜 남아도 이렇게 살아왔어요. 이 찰범벅도 딴 데는 시루떡처럼 얇게해서 위에만 고물 뿌려줘요. 우리는 찹쌀보다 고물이 더 많아요. 그러니 설탕이 안들어가도 달아요.”



 





“6개월 동안 죽만 먹었다”



유씨는 원래 서대문에서 방앗간을 하다가 파주로 이사오게 되었다. 이사와서는 6개월 동안 죽만 먹었다고 한다. 하늘에서 눈이 새들어올 정도로 허름한 집에 월세로 살았다. 동네사람들이 ‘서울방앗간’을 보면서도 못 본 척 했다. 선배나 후배가 떡집 한다며. 그런데 동네사람들이 떡을 맞추지도 않고, 떡을 해서 시장 나가서 파는 것도 아닌데 계속 떡을 찧으니까, 이상하다 싶었는지 하나 둘 씩 와서는 맛을 보고 갔다.



 “먹어보니 다르잖아요. 그 다음부터 우리집 단골이 되었어요.” 그렇게 한 2년을 예전의 서울 손님들 주문도 받으며 애쓰다보니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동생들 뒷바라지하고 자식들 공부도 시켰다. 남동생은 압구정동에서 한의원을 하고 있고, 아들은 의학박사로 연구소에 재직 중이고, 딸은 영어강사이다. 모두 그의 손에서 빚어진 떡으로 맺은 열매이다. 훌륭하시다는 칭찬에도 자기들이 알아서 했지, 해준 게 없다 고 겸손해하신다.   



 





우리집 추워도 연탄 나눠준 아버지 본받아 정기적 후원



유홍창 씨는 방앗간이 잘되는 것이 아버지의 후광이라 생각한다. “국민학교 다닐 때 연탄을 땠는데, 아버지가 우리는 추워도 남에게 베풀어야한다며 연탄을 나눠줬어요. 그렇게 남에게 잘 베풀었는데, 그 덕에 저도 복 받는 거예요.”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았나 보다. 그도 소녀가장과 노인들을 정기적으로 도와주고 있다. 



후원하던 한 소녀 가장이 왔었단다. “아저씨 생일 선물이예요.”라며 내민 선물을 풀어보니 담배 1갑에다 위 아래 담배갑 크기로 종이를 잘라 만들어 3갑 크기로 포장한 선물이었다. 예전 담배를 피울 때 일이지만, 기억에 남는다고. 그 소녀의 애틋함이 전해져와서 마음이 짠했다. “요번에 제가 도와주던 파주여고 애가 졸업을 해요. 그 아이가 하는 말이 자기는 가을부터 실습을 나가니 생활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다음 사람에게 인계하겠다고 했어요. 그러자고, 작지만 나눠 쓰자 그랬죠.”



 





“죽었다 다시 태어나도 떡집한대요.”



얘기를 나누다 보니, 오른손 검지가 없다. 



“손은 다치신 건가요?” 



“초등학교 때 까불다가 그랬어.” 



옆에서 부인이 방아 기계에 다친 거라 말씀하신다. 초등학교 때 아버지를 도와 일을 하다가 손가락을 잃은 거다. 



“저 양반은 죽었다 다시 태어나도 떡집 한대요.” 부인이 떡을 자르면서 얘기한다.



유홍창 씨는 유난히도 눈이 반짝였다. 마치 유치원 아이들 눈망울처럼 투명하게 느껴져서, 앞에 앉은 사람이 거짓말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떡 만드는 게 재미있어요. 맛있게 먹었다는 손님 전화를 받을 때는 피로가 싹 가셔요.” 정말 천직인가보다.  



 



“떡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거요? 양심이죠.”



떡 체인점이나, 좀 된다는 집 가보면 떡이 참 예쁘다. 여기는 그런 거 안하냐고 물어보았다. 공장떡은 무척 달고, 방부제를 안 쓸 수 없단다. 



그렇지만 자신있다. 먹어보면 알 수 있지 않겠냐는 답. 손님들이 따끈따끈한 떡을 먹을 수 있도록 시간을 맞추려면 새벽 일찍 움직여야한다. 남들보다 힘이 들어도 맛있게 먹도록 시간을 맞추는 게 원칙이다.



“떡 만드는데 가장 중요한 게 뭘까요?”



“떡에서 가장 중요한 거요? 양심이죠.” 의외의 답을 듣고 농담인 줄 알았다. 기술이나, 재료나, 노하우 등등을 말할 줄 알았는데...양심이라니?  



“양심이 있으면 좋은 쌀에다 성심껏 해요. 뜸도 오래 들이고. 그럼 맛이 달라져요.”



대설로 버스 운행 안하던 날, 



21번 넘어지면서 떡 배달



떡집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를 물었다.



“송편을 아침 7시까지 갖고 오라는 거예요. 아침에 보니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버스가 안 다니는 거예요. 오토바이 타고 21번 넘어지면서 오금리까지 갔어요. 7시 전에 출발했는데. 9시에 도착했어요. 박스가 터지고, 옷도 엉망이고... 할머니가 버스도 안 다니는데 고생했다고 밥을 차려주셨는데. 밥상 앞에서 어찌나 울었던지....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나요.”   



포장도 끝나고 조금 있으면 떡 배달을 가야 한다. 취미를 물으니 영화 각본을 쓰는 것이란다. 총각 때 제작자가 영화 각본을 팔라고 했는데, 50만원 차이로 안 팔았단다. 작년에도 1편을 썼다 한다. 영화 각본 쓰는 방앗간 아저씨! 조만간 서울방앗간을 다시 찾아야겠다.      “제가 떡을 퍼돌릴 게 5가마예요. 1년 동안 고맙게 도와주신 분들 있잖아요. 내가 아는 사람, 마누라 친구들 주고. 그게 다 행복이예요.”  



유홍창씨는 나눔! 행복!을 얼굴에 써붙인 것 같이 환했다. 



 



글 · 사진 | 임현주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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